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공공 정원의 긴 유선형 벤치가 이방인을 환대한다. 조경설계 서안 제공
안온한 일상을 앗아간 흉흉한 겨울을 통과하며 새해를 맞는다. 솔비투르 암불란도(Solvitur ambulando). ‘걷다 보면 해결된다’는 뜻의 라틴어 경구를 다이어리 첫 장에 적었다. 추운 도시를 걸었다. 광기 가득한 도시의 소란이 나의 걸음 뒤로 조금씩 물러난다. 몸과 마음과 세상이 하나로 조율된다.
한강을 향해 걷다 서울 신용산역에 맞붙은 아모레퍼시픽 사옥 공공 정원에 멈춰 섰다. 찬 공기에 바삭거리는 백합나무들. 그 아래 길게 놓인 유선형 벤치가 말을 건넨다. 잠시 앉아서 쉬었다 가. 잠깐이라도 느긋하게 머물러 봐. 어느 산책자의 체온이 남아 있는 자리가 나를 환대한다. 겨울 오후의 한 움큼 햇살을 살갗으로 감각하며 해진 마음 추슬러 다음 걸음에 나섰다.
도시의 의자는 걷는 사람을 머무르게 한다. 걷기는 도시에 자유를 주고, 앉기는 여유를 준다. 걷기는 시간을 우아하게 잃는 방법이고, 앉기는 나만의 공간을 가장 쉽게 마련하는 방편이다. 눈치 안 보고 앉을 수 있는 나의 자리가 생기면 도시의 강퍅한 표정이 편안하게 바뀐다. 반복되는 도시의 일상에 리듬이 만들어진다. 한껏 몸을 기댈 수 있는 나의 자리는 부유하는 이방인에게 소속감을 준다. 도시의 의자는 효용과 소용, 유용과 실용으로 꽉 찬 자본주의 도시의 빈틈없는 질서에 무용의 기쁨과 포용의 여유를 허락한다.
프랑스 파리의 오랜 상징인 뤽상부르 공원의 녹색 의자가 ‘잠시 앉아서 쉬었다 가’라고 말을 건넨다. 배정한 제공
거리의 벤치에 멍하게 앉아 다른 사람들 구경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있을까. 코펜하겐을 보행자의 도시로 개조해낸 도시설계가 얀 겔에 따르면, “도시의 질적 수준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옥외 공간에 앉아 머물 수 있느냐에 달렸다.” “우리의 발길과 눈길을 끄는 가장 매력적인 구경거리는 그저 타인이다. 그들의 일상생활이 도시의 매력이다.” 거리에 앉아 평범한 그들의 일상을 바라보면 외로운 도시가 외롭지 않다.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도시 문화의 즐거움을 깨닫게 된다.
의자와 벤치는 한 도시의 문화이자 역사다. 뤽상부르 공원의 이동식 녹색 철제 의자가 없다면 파리가 아니다. 9천개 넘는 센트럴파크의 벤치는 뉴욕의 오랜 상징이다. 도시의 의자에는 시민들의 이야기와 추억이 쌓여 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 무엇을 고르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라는 대사로 유명한 ‘포레스트 검프’의 벤치 장면, 어느 벤치에 새겨진 “이 정원을 사랑한 준을 위해, 그녀 곁에 항상 앉아 있던 조셉”이라는 문구를 읊조리는 ‘노팅힐’의 명장면 같은 낭만의 풍경만 있는 건 아니다. 고단한 도시의 이름 없는 벤치에는 가난한 연인의 처연한 대화가, 갈 곳 없는 노인의 긴 하루가, 누울 자리 없는 노숙인의 힘겨운 새벽이 짙게 감광되어 있다.
앉을 곳 많은 도시가 걷기에도 좋은 도시다. 편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좋은 도시의 필요조건이라면, 여유롭게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는 충분조건이다. 하지만 도시를 걷다 앉아본 적이 있는가. 대로변 인도와 이면도로에도, ‘걷고 싶은 거리’라는 이름을 단 보행 가로와 그 많은 ‘○리단길’에도, 앉을 만한 곳은 없다. 거의 모든 거리가 차에서 내려 목적지로 가기 위한 복도일 뿐이다. 길을 걷다 지친 사람, 낯선 동네에서 어디로 갈지 갈팡질팡하는 사람, 긴 주말을 홀로 보내는 사람,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는 사람, 급히 이메일 답장을 해야 하는 사람, 약속 시간까지 30분 남은 사람. 그 누구든 자본의 도시 속에 몸을 앉히려면 아메리카노 한잔 값 내고 비좁은 카페의 구석 자리를, 인스턴트 공간 상품을 사야만 한다.
나처럼 한강을 향해 10차선 대로를 따라 무작정 걷다가 이방인을 환대하는 벤치를 만난다는 건 우연에 가까운 사건이다. 아모레퍼시픽이 시민들에게 개방한 신용산역 모퉁이의 공공 정원은 공개공지와 가로 공원을 하나로 합쳐 디자인한 유례없는 공간이다.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건축, 정영선과 박승진의 조경, 올라퍼 엘리아슨의 조각이 동거하지만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사치스럽지 않고 검박하다. 건축법 규정에 따라 대지 일부를 형식적으로 내놓은 대개의 공개공지와 달리, 이 공간은 시각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모두에게 열려 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공개’ 사유지임에도 남의 집 마당에 몰래 들어간 것 같은 불안감을 주는 일반적인 공개공지들과 다르다. 기업 사옥의 부지에 속하는 공개공지와 구청이 관할하는 가로 공원 사이에 경계가 없다. 법적 소유가 다른 두 공간을 한데 엮어 세심하게 디자인한 것임을 알아채기 어렵다. 손으로 섬세하게 자른 작은 화강석 포장이 두 공간에 똑같이 덮여 있다. 가느다란 금속 경계선이 지면에 붙어 숨겨져 있을 뿐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유선형 둔덕들에 정연한 수형의 키 큰 백합나무 100그루가 심겼고, 길게 굽이치는 벤치가 둔덕들 가장자리를 둘러싼다. 마음 놓고 앉아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을 누리며 도시의 일상에 쉼표를 찍을 수 있는 장소다.
아모레퍼시픽 정원처럼 소유와 무관하게 누구나 앉아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그저 예외적인 선물로 여겨야 할까. 그렇지 않다. 앙리 르페브르는 68운동의 저항 정신을 이끈 역저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도시란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하는 집합적 공간”이며, 모든 시민은 “도시라는 집단적 ‘작품’을 함께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 그가 정의하는 도시는 교환 가치에 의존하는 상품과 달리 사용 가치가 더 중요한 공동의 작품이다. 따라서 도시에 대한 권리는 누구나 공간에 접근하고 사용할 권리, 시민의 필요에 부합하게 공간의 생산에 참여하고 사적 소유권에 관계없이 공간을 전유할 권리다. 누구나 도시를 쓸 권리를 가진다는 르페브르의 주장은 다양성과 포용을 요청하는 지금 여기의 도시에도 유효하다. 마음껏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도시권의 기본 전제다. 일종의 인권이다.…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 환경미학자이자 조경비평가인 배정한이 일상의 도시, 공간, 장소, 풍경에 얽힌 이야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