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에는 파견근무제도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지역 농축협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본부로 파견되어 근무하는 제도이다. 내가 이 제도를 알게 된 것은 약 5~6년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시골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고, 여전히 서울에 살던 기억이 남아 있을 때였다. 그래서인지, 문서를 보는 순간, 강렬하게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서울에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실패해서 시골로 내려왔다는 자격지심이 가득할 때였고, 여전히 큰 물(?)에서 놀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했다. 완전히는 시골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을 때였고, 못다 한 서울에서의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한(?)을 풀어볼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절대 보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 욕구는 애써 삼켰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시골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다. 시골 생활이 주는 편안함, 익숙한 사람들이 주는 안락함,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웠다. 직원 중에 현재 생활이 불만족스럽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어째서?”과 같은 반문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특히 바쁜 본점에 있다가 지점으로 전출된 후로는, 세상에 이렇게 꿀 빠는 직업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던 내가 금번에 파견제도를 신청한 것은 다소 충동적인 일이었다.
시작은 이러했다. 올해도 해당 문서가 뜬 것을 본 순간, ‘아, 나도 이거 가보고 싶었을 때가 있었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 내가 여기에 지원하게 된 것은 다소 충동적인 일이었다. 나는 사실 충동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생각이 많고 소심해서 도전했다가 취소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충동적이라는 말을 들을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 지원은 말 그대로 충동적이었다.
평소 알고 계시던 직원분이 ‘자신도 지원하고 싶다’라고 말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아, 여기 나도 가고 싶었는데!’ 하는 강한 충동이 들었다. 문서가 새롭게 보였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나이 제한도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있으면 가장 기본적인 지원 자격에서 탈락이겠구나! 갑자기 초조함이 몰려들었다. 그 마음에 불을 지핀 것은, 먼 훗날 내가 “나 파견 가고 싶었는데, 사무실에서 못 가게 할 것 같아서 지원 못 했어~”라고 말하면 사무실에서 “네가 지원을 안 해서 그런 거지! 말했으면 보내줬지!”라고 대답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 말이나 해보자!
그래서 처음에 A 차장님께 말을 던졌다. 내 말을 들은 차장님은 자기도 젊었을 때 가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며 한번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며 나를 응원했다. 그의 응원에 힘입어 또 다른 차장님에게도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그녀도 나라면 갈 수 있을 거라며 나를 응원한다고 했다. 두 사람의 응원이 고마웠지만, 사실 진짜 중요한 것은 윗분들의 결정 아니겠는가? 나는 아마도 지점장님이 허락을 해주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이렇게 운만 띄워놓고 내년에는 이번 지원을 어필하면서 꼭 보내달라고 해야지~ 나는 이런 식으로 다소 가볍게 생각하며 지점장님께 운을 띄웠다.
“제가 여기 가고 싶은데, 지점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은 정말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지금 사무실 생활은 정말로 편안했으니까.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모든 것은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네가 나한테 말할 정도면 결심이 굳건하다는 건데, 내가 뭐라고 너의 지원을 판단하겠냐. 본점에 보고하겠다.”
“…… 네?”
예상치 못한 지점장님의 반응에 나는 당황했다. 진짜 가라고요?? 나는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감사(?)의 인사를 마치고 지점장실 밖으로 나왔다.
…. 결심이라니?? 무슨 결심? 난 그냥 급발진한 것뿐인데??
내가 보고를 한 날이 목요일이었다. 나는 지점장님의 반응에 당황하면서도 마음속 한구석으로는, ‘그래. 임원 회의를 하는 월요일이나 되어서 본점에 보고하겠지’, 이런 식으로 다소 안일하게 생각했다. 월요일까지 내 마음의 준비를 하겠다는, 그때까지도 느슨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퇴근하는 나에게 차장님은 지점장님께서 본점에 보고했다고 말씀하셨다……. 아?
그 뒤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음날에는 본점에서 허락이 떨어졌고, 다음 주 월요일에는 상임이사님이 지원서를 작성하라고 했고, 그다음 날에는 조합장님이 서류 쓰라고 했다고 지점장님이 지원서 언제 제출할 수 있냐고 여쭸다.
아?? 나는 아직 갈지 말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나는 그냥, 그냥 해 본 발이었다고!!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나를 보내려고 하는 거야? 나는 준비가 안 되었는데, 우리 농협은 준비가 다 되어있었다. 언제부터 우리 농협이 이렇게 선진농협이었냐고!! 이 정도면 그냥 쫓아내는 거 아니냐고!
파견지원 자체는 평탄했지만 지원 부서의 선택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해오던 분야를 지원하고 싶었지만, 사무실의 입장은 좀 달랐다. 내가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고 새로운 역량을 쌓아오길 바랐던 것이다. 결국, 많은 고민 끝에 나는 사무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지원서를 냈지만, 발표가 나는 데는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갈 뿐…. 그러나 마음은 태풍 속이었다. 내가 간다고? 진짜? 서울에? 시골에서만 일하던 내가 본부에서 일한다고??
내 생각에도 그렇고, 소문도 그렇고, 합격이 엄청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조합장님 추천까지 받아서 지원하는 직원들을 쉽게 거절하기는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99%의 합격률이라 해도 내가 떨어지면 합격률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합격 발표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소문이 났다. 내가 서울로 떠난다고…. 다들 엄청나게 축하(?)를 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아, 진짜 떨어지면 큰일이었다.
동시에 심리적으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도대체 이 제도는 뭐길래 이렇게 정보가 하나도 없을 수 있나? 내가 서울 가서 잘할 수 있을까? 나는 슬로우 스타터다.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타입. 이 농협에도 적응하는데 2-3년이 걸렸고, 친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는 데는 서너 배는 넘는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하고 어울릴 순 있을까? 왕따라도 당하면 어쩌지? 일은 따라갈 수 있을까? 전혀 모르는 분야인 만큼 용어도 낯설고 일을 시켜도 못 알아먹을 텐데.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일 못한다는 소리 들으면 너무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할 것 같은데!
이직하고 제일 힘든 사람은 전 직장에서 적응을 잘했던 사람이라는데, 내가 바로 그 사람이네?
아, 나는 왜 간다고 했을까? 뭐를 위해서? 지금 직장에서 적응도 잘하고 인정도 받으며 다니고 있는데? 왜? 굳이? 뭘 위해서? 왜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롭게 적응하고 힘들어하는 길을 선택한 걸까? 급여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돈을 모으기는커녕 더 많이 써야 하는데?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어서 외롭기 그지없을 선택을 왜 나는 저지른 걸까? 심지어 서울 생활하면 겨우 배운 운전을 잊을까봐도 걱정되었다.
모든 것이 스트레스였다. 가장 큰 스트레스는 이런 선택을 한 자신이었다. 내가 가고 싶다고 했고, 그래서 사무실에서 크게 마음 써서 보내주었는데, 그런데도 스트레스를 받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계속 이대로 우물 안 개구리로, 시골 쥐로 사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본부에 연락해서 그냥 떨어뜨려 달라고 연락할까? 아, 그런데 떨어지는 건 좀 자존심 상하는?’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심리적으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 이제 진짜 되돌이킬 수가 없다. 서울로 가야 했다.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었다. 나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되려고 노력했다. 그래, 장단점을 모두 계산해서 마음을 정리하는 거야! 내 판단에 힘을 실어주는 거야!
우선, 이제 정말 집을 구해야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숙소를 지원해 주더니 이번에는 스스로 구해야 한다고 했다. 시골에서 서울의 숙소를 알아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말마다 서울을 올라오고 매일 퇴근하고 두세 시간씩 네이버 부동산 및 각종 부동산 어플을 살펴보고….
집을 보러 서울을 오가는 일은 시간과 체력적으로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집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평생 살 집(=시골의 집) 구할 때도 그렇게 고민했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집순이가 되어가는 나 자신을 알아서 그런지…. 집을 구하는 일은 더욱 중요해졌다. 그리고 또 하나. 월세가 너무 비쌌다. 서울의 집이 요구하는 월세는 어마어마했다. 그 월세를 주면 나는 향후 하우스푸어로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도 이런 집에 살아야 한다고?”
서울의 주거난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었다. 아, 정말 힘들겠다-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내 일이 되니 느낌이 달랐다. 왜 서울 사람들이 그 긴 출퇴근 거리를 감수하고 다니는지, 깨끗한 신축아파트에 목을 매는지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렇게 집을 보고 다니다가 오빠 부부의 아파트에 들어가면 대궐에 들어간 기분이었으니까. 서울 생활을 도전함으로써 배운 첫 번째 감각이었다. 서울 주거난 공감력 생김. 플러스 1점.
고생 끝에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집이었지만……. 내가 싫어하는 점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집.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이 집을 골랐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내가 안 좋아하는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전입이 되는 거였다. 내 작고 소중한 보증금. 이 집을 선택하는데도 정말 많은 고민과 번복이 있었다. 그 과정은 정말로 고통스러웠고 나 자신이 얼마나 우유부단한 사람인지 알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를 조금 더 싫어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고…. 마이너스 10점.
이번에 이사하면서 주변의, 특히 가족의 도움을 많이 얻었다. 오빠가 운전해 준 덕분에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위치에 있는 많은 집을 볼 수 있었고, 새언니가 함께 집을 보아주었다. 이사 후에는 엄마가 함께 와서 청소를 도와주었고, 새언니는 내가 소홀하기 쉬운 짐이나 먹을거리 등을 챙겨주었다. 나는 내 곁에 가족들이 있는 걸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가족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도……. 특히 엄마의 존재감이 컸는데, 나는 엄마와 함께 살면서도 엄마의 존재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다. 때로는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서울에 함께 올라와서…. 내일부터는 엄마가 없다고 생각하니 격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퇴근 후,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밥을 함께 먹었고, 밥 먹는 동안 나누던 짧은 대화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그리고 친구들. 나는 직장 동료들이 내 친구다. 집순이인 난 그들과도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슬퍼졌다. 술을 마시고 싶은 날, 편하게 연락해서 술 한잔하자고 말할 수 있는 선배, 주말에 혼자 산책 가기 싫으면 같이 가자고 연락할 수 있는 선배…. 그들이 서울에는 없다. 물론 서울에서도 만들어가면 되지만…. 내가 그런 친구들을 얻는 데 10년이 걸렸는데…. 서울에는 1년밖에 거주하지 않는다. 만들 수 있을까? 나는 기본적으로 비사교적인 타입이고, 나의 사교성은 사회화 때문에 만들어진 교육 효과의 결과물이다…. 이번 일로 나는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에 대해 많이 깨달을 수 있었다. 플러스 10점.
서울에 와서 집 정리를 하고 온갖 잡다한 물건들을 사다 나르면서, 어째서 한 사람이 사는 데는 이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한가? 생각했다. 미니멀 라이프로 살 거라고 다짐했는데 현실은 1년 뒤에는 버릴 조잡한, 쓰레기를 겨우 벗어난 물건들을 애써 번 돈으로 사다 나르고 있다. 마이너스 3점
서울을 올라간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걱정한 것은 나의 식생활이었다. 평소에도 잘 챙겨 먹는 스타일이 아닌데, 혼자 있으면 굶어 죽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조금은 인정하는데…. 나는 밥을 잘 챙겨 먹는 스타일이 아니다. 밥 챙기는 게 너무 귀찮기도 하고. 먹는 양 자체가 많은 편도 아니고…. 서울 올라온다고 신경을 썼더니, 늘 입던 바지 허리가 살짝 커졌다. 아직 서울 생활 시작도 안 했는데…. 피골이 상접해짐. 마이너스 1점.
이렇게 따지고 보니 점수는 마이너스다.
…. 괜히 했다는 뜻인데? 하지만 현실은 당장 (이 글 초안을 쓰는 기준) 내일부터 새로운 직장생활이 시작된다. 너무 떨리고 긴장되고 걱정된다. 하지만 걱정을 안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이 직무를 준비(이 부서에서는 엑셀을 많이 쓴다는 말에 돈 주고 엑셀 강의를 유료구매하여 매일매일 듣고 있다)했다. 이거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 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하고 있고,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 해서도 바꿀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물론 이런 생각들 자체가 거의, 자기계발서적에나 나올 법한 문구, 정신승리에 가깝다는 것도 안다.
솔직히 나는,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일을 시작하는데 설렘을 못 느낀다는 점에서 내 자신이 너무, 안타깝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겠지. 앞으로 딱 1년. 아니, 1년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부디 잘 적응해서…. 시골 쥐가 서울 쥐가 될 수 있기를! 마이너스 지표가 플러스로 바뀌기를!! 힘내라, 내일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