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모 기자]
‘장가(丈家)간다’와 ‘시(媤)집간다’라는 말이 있다. 장가를 가든 시집을 가든 요즘 말로 결혼한다는 표현이다. 조선 시대 결혼 문화를 돌이켜보면 이 표현들이야말로 간단한 말이 아니다.
오롯이 ‘장가간다’라는 말은 남자가 장인(丈人)의 집에서 일정한 기간 처가살이하거나 장인의 마을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말이다. 예컨대, 조선 선조 시대를 전후하여 결혼 풍속도가 ‘장가(丈家)간다’에서 ‘시집간다’로 변한 바람에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시재(詩才)와 예능을 보였던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삶도 확연히 다르게 나타난다.
어떻든 조선 전기 ‘장가간다’라는 결혼 풍습 속에 형성된 전형적인 씨족 마을이 바로 경주 양동마을이다.
필자는 지금 경주 양동마을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우선, 고려 말 경주 양동마을에 살던 여강이씨 이상도의 사위로 장가든 풍덕류씨 류덕하는 여강이씨 손소(1433-1484)를 사위로 맞이하여 양동마을에 정착시킨다. 양동마을 월성손씨 입향조가 된 양민공 손소는 1495년(세조5년) 경에 송첨(松?) 종택을 짓고 후손들에게 하루에도 ‘인(忍)’자를 백 번씩 세기라는 뜻으로 ‘서백당(書百堂)’이라 편액을 내건다. 이번엔 손소가 여강이씨 이번을 사위로 맞이하여 외손자 회재 이언적(1491-1553)을 서백당에서 낳게 한다.
아시다시피 회재 이언적은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다져 퇴계 이황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며 동방 5현이자 문묘 18현에 배향된 인물이다. 이처럼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처가에 살거나 처가에서 자식을 낳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양동마을은 ‘외손의 마을’이라고도 한다.
ⓒ 김병모
양동마을은 강과 산, 들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함께 밤하늘의 별들처럼 늘어져 있는 초가집과 마을 고택이 진풍경이다. 양동마을은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조선 시대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전통 마을이다.
이 마을은 손소의 아들로서 이조판서를 지낸 손중돈과 손소의 외손으로 조선 성리학의 선구자 회재 이언적 같은 출중한 인물들이 연거푸 배출되어 크게 번창한다. 그야말로 조선 전기 월성손씨와 여강이씨 두 성씨가 이 마을로 장가들어 뿌리를 내린 씨족 마을이다.
무엇보다 먼저, 필자는 손중돈과 회재 선생이 태어난 송첨(松?) 종택, 서백당(書百堂)으로 향한다. 마을 뒤편 높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서백당으로 들어서자 아름다운 기와 선(線)으로 두른 흙담 너머 확 트인 시야가 가슴까지 시원하게 한다. 회재 선생을 배출한 고택 답게 수백 년 묵은 향나무가 똬리를 풀면서 사랑채 쪽으로 필자를 안내한 듯하다.
사랑채 바로 옆으로 ‘내외담’이 여성들의 공간 내실과 사랑채를 가르고 있다. 요즘 시선으론 낯설기도 하겠지만, 조선 사회는 그 담을 통해 공간을 분리함으로써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예기(禮記) 내칙 편)을 엄격하게 실천하는 조선 전통 유교 사회의 근간을 세운다.
풍수지리 지관에 따르면 서백당에서 이조판서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 외 한 명 더 현인이 배출될 것이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나머지 한 명은 어떤 인재가 배출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서백당에서 좋은 기운을 받아서 인지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종가 무첨당(無?堂)으로 향한다.
무첨당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여강이씨 회재 이언적 선생의 종가 제청이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관리들이 영남 지방을 순찰하거나 여행하는 선비들의 주요 방문지 중 하나가 바로 양동마을이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도 예외 없이 양동마을을 방문하여 무첨당에 들러 ‘영남에는 선비들이 많다’라는 좌해금서(左海琴書) 현판을 친히 써 내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을 외쳤던 흥선대원군의 현판이 역사의 흐름을 가르며 여전히 걸려 있는 것으로 바, 당시 무첨당의 위상을 알 것만 같다.
양동마을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돌리는데 관가정 고택 앞에 하얀 말 한 마리가 주인을 기다린 듯 꼬리를 살래 살래 흔들어 대고 있다. 관가정 주인이자 위세 등등 했던 이조판서 손중돈의 행차를 기다리기나 한 듯 말이다. 양동마을도 세월을 비켜 가지 못했다. 오백 년 세월의 양동마을을 걸어서 돌아 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 고스란히 보존된 이 양동마을이 눈에 밟혀 필자의 발걸음이 더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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