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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00년간 신라의 도읍이던 경주에서 임금과 왕족의 궁궐이 자리한 곳은 어디였을까. 이에 얽힌 오랜 궁금증이 마침내 풀리기 시작했다.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등의 사서기록을 근거로 왕경 유적으로 널리 알려진 경주 월성을 궁궐이 있던 곳으로 지목해왔다. 그러나 최근 발굴 결과 월성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월지(안압지) 연못 둘레의 영역에서 대규모 궁궐터가 확인됐다. 임금과 태자의 거처로 추정되는 전각과 딸림 시설 등이 잇따라 출현하면서 월성과 월지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기존 시각을 바꾸는 것이 불가피해졌다는 견해들이 나온다.
국가유산청 산하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는 왕경 토목기술이 집약됐다고 알려진 태자의 거처와 정무 공간인 동궁 전이 그간 알려졌던 것처럼 월지 연못 서쪽이 아니라 연못 동쪽에 자리한다는 내용의 지난해 발굴 성과를 6일 공개했다.
연구소 쪽에 따르면, 발굴된 동궁 추정 대형 건물터는 월지 연못 동남쪽 권역(Ⅱ-나지구)에서 확인됐다. 정면 5칸(길이 25m)에 측면 4칸(18.1m)의 직사각형 평면에 18개의 기둥 자리가 확인되며 일정한 시점에 건물 남쪽에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돌출 시설인 월대 공간(길이 3.8m)이 증축된 것으로 드러났다. 진입 계단은 모두 다섯개로 건물터 정면에 두개가 있고 뒤쪽에 한개, 오른쪽 측면에 한개를 둔 것으로 파악된다.
이 대형 건물지를 복도식 건물인 거대한 회랑과 익랑이 둘러싸고 그 앞에는 넓은 마당시설이 펼쳐져 있으며, 내부에는 따로 정원의 연못인 원지가 두 곳이 조성된 흔적들도 잇따라 나왔다. 특히 원지는 현재 너비 43.56m, 길이 17.2m에 깊이 1m에 달하며 내부에 두 개의 인공섬까지 갖춘 얼개다. 기존 ‘동궁과 월지’와 연결되지 않고 따로 운영되어 독립된 배수 체계를 갖춘 것으로 밝혀냈다.
그동안 신라 태자가 거처했던 동궁 궁궐터는 구체적인 실체가 파악되지 않아 그 위치가 어디냐는 학계의 오랜 논란거리였다. 1975년부터 수년간 이어진 월지와 그 주변 대지 발굴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던 월지 서쪽(Ⅰ-가지구)의 대형건물터가 지금까지는 가장 유력한 동궁터 추정 유적이었다. 정면 7칸(29.1m)에, 측면 4칸(19.4m)에 10여개의 기둥자리, 남쪽 정면 계단 2개, 뒤쪽 계단 1개를 갖춘 장대한 규모를 갖췄고 왕경인 월성 동쪽에 자리해 동궁으로 부를만한 입지조건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지 동쪽에서 새롭게 실체를 드러낸 동궁터 추정 대형건물터의 발견으로 기존 월지 서쪽 건물터는 왕이 거처했던 정무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커지게 됐다. 이런 추정에 따르면 신라의 궁궐 얼개는 월지를 중심으로 서쪽에 왕의 거처와 정무공간인 정전이, 동쪽에 태자의 거처와 정무공간이 서로 마주 보고 배치되는 모양새가 된다.
연구소 쪽도 “월지 서쪽의 기존 에이 대형건물터는 주변보다 높게 조성된 대지 위에 있고, 건물 유적 자체의 위계도 높아 보이는 점 등으로 미뤄 동궁으로 확정 짓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월지 동쪽에서 기존 건물보다 위계는 한 단계 낮은 대형 건물터가 추가 확인되면서 이 건물터를 동궁으로, 당초 동궁으로 추정했던 서쪽 건물터는 왕의 공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과 두 공간이 독립적으로 운영됐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신라사 전문가인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도 “이번 동궁전 건물터 발굴결과는 통일 이후 궁내에 연못을 파고 동궁전 전각들을 두었다는 사서의 기록과도 맞아떨어진다”고 짚었다.
앞서 연구소가 지난 2017~22년 발굴한 동궁 추정 건물터 유적의 북쪽 지구와 이번에 확인한 동궁 추정 건물터와의 관계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당시 북쪽 지구에서는 수세식 화장실 터를 비롯한 40여동의 크고 작은 건물터와 우물과 배수로, 담장 등의 흔적들이 상아주사위, 두마리 새가 새겨진 금박 조각 등의 고급 유물들과 함께 발견됐었다. 유적의 성격상 동궁터 추정 건물지가 태자의 정무공간이라면, 북쪽 지구는 태자와 그를 보좌하고 시중을 드는 궁인들의 생활공간이었을 것으로 연구소 쪽은 분석했다.
월지 동남쪽 Ⅱ-나지구 발굴현장 유적 배치도. 동궁전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터와 회랑, 연못인 연지 등이 보인다.월지 동쪽 동궁전 추정 대형건물터 앞 마당시설을 내려다본 모습.원지 연못 유적 내부의 섬 흔적.
하지만 학계 일각에서는 태자의 동궁전으로 섣불리 단정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기존에 발굴됐던 월지 서쪽 건물터와 이번에 나온 월지 동쪽 건물터에서 왕의 정전이나 사찰 금당에서만 보이는 ‘내진감주(內陣減柱)’라고 불리는 특수한 공간 구조가 공통으로 확인된다는 게 근거다. 두 건물터 한가운데에는 아예 기둥을 치지 않고 내진이라고 부르는 직사각형 모양의 빈 구역을 둔 것이 보이는데, 이런 공간 구조를 고고학계와 건축사학계 전문가들은 왕의 옥좌나 큰 불상들의 대좌를 안치하기 위한 공간으로 해석해왔다. 따라서 이번에 드러난 월지 동쪽 대형건물터에도 내진감주의 구조가 보인다는 건 이 건물터 역시 월지 서쪽의 건물터처럼 왕의 공간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다. 건물 자체의 크기는 서쪽 건물터보다 조금 작지만, 앞마당은 더 넓고 서쪽 건물터에 없는 측면 계단이 확인됐다는 점 또한 위계를 낮춰 볼 수 없는 근거가 된다는 지적도 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조사결과를 반영한 경주 동궁과 월지 조사구역의 건물배치 추정도. 기존에 왕경으로 간주해온 월성이 아니라 월지를 중심으로 핵심 궁궐이 조성됐다는 것을 보여준다.인공 연못인 원지 유적 안의 조경석들.원지의 출수구 흔적.
월지 동쪽의 대형 건물터 발굴로 월성의 궁궐 존재설은 근거가 뿌리째 흔들리게 됐다. 기존 왕경유적인 월성의 경우 201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됐지만, 아직 일반적인 대형 궁궐 전각의 형식과 규모에 갈음하는 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정황들로 미뤄 월성은 4~7세기 고신라 시기엔 간이 왕궁의 면모를 유지하다 월지와 주변에 대형 건물군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8세기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궁궐의 딸림 영역으로 기능과 역할이 축소됐을 것이란 해석이 설득력을 얻게 됐다.
월성 서남쪽에서 확인된 의례 유적 내부의 주요 유물 출토 위치를 표시한 설명그림.수정 목걸이 담긴 나무상자. 출토당시 모습이다.월성 서남쪽 의례유적에서 추가발굴된 또다른 한마리의 골격. 출토 당시 모습이다.
연구소 쪽은 경주 월성 유적 서남쪽 에이(A) 지구의 추가발굴 성과도 공개했다. 지난해 10월 신라의 모태인 3세기 사로국 시대 건물터와 의례 제물로 바친 수컷 개의 전신 골격 등이 나와 눈길을 모았던 유적이다. 지난해 12월까지 진행된 추가 조사에서는 또 다른 한마리의 전신 골격을 찾아냈고, 주변에선 수정 목걸이가 담긴 나무상자, 둥근고리칼, 상어 이빨, 1,200여 알에 이르는 콩들이 나왔다. 당시 고급품인 옻칠된 나무상자 속에서 확인한 수정 목걸이는 수정이 꿰어진 실까지 함께 발견됐다. 상태가 좋아 사로국 시기 신라 의례의 틀거지를 밝히는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유산청은 6일 오전 11시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최근 발굴 내용을 포함한 경주 월성·월지 유적의 10년 조사성과를 최응천 청장이 직접 설명하는 공개발표회를 열 예정이다.
글 노형석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도판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출토 목걸이의 수정 부분에 실이 꿰어진 모습을 확대한 사진.월성 서남쪽 의례 유적에서 출토된 둥근고리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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