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위치한 개농장에서 동물보호 활동가들이 개를 구조하고 있다. ⓒ 한국토토뉴스한송아 기자
(서울=뉴스1) 한송아 기자 = “서울 강남에 농장이 있어요.”
1년 6개월, 봉사자 이현정 씨의 간절하고 끈질긴 노력 끝에 서울 강남의 농장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파가 시작된 지난 4일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을 찾았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재개발 관련 각종 현수막이 어수선히 걸려있었다. 구룡마을은 지난해 재개발이 확정됐다.
앞장선 봉사자를 따라 판자로 이뤄진 집들 사이로 굽이진 골목길을 한참 올라갔다. 그러자 점점 또렷이 들리는 짖는 소리. 약 1년 6개월 전, 이곳에서 식용을 목적으로 하는 농장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듣고 왔지만, 막상 와보니 도무지 이런 곳에 농장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개농장, 판자와 철망으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견사에 갇혀 있는 백구 동동이가 사람을 보고 반겼다. ⓒ 한국토토뉴스한송아 기자
전날 내린 눈으로 꽁꽁 얼어버린 길과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맹추위 속에 발이 절로 동동 굴러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맨땅 위에 철망과 판자로 얼기설기 얽힌 구조물 속에서 아무런 보온 조치 없이 개들이 사육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농장 맞은편 높게 들어선 강남 아파트들이 농장의 모습과 대조를 이뤄 더욱 참혹하게 다가왔다.
개들은 추위를 제대로 막을 수 없는 공간에 갇혀 바람과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그대로 감당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의 방문에 반가워 꼬리를 흔들거나 경계심으로 구석에서 잔뜩 움츠리는 등 개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견사에 갇힌 황구 건이가 겁을 먹고 바라보고 있다. ⓒ 한국토토뉴스한송아 기자
개들을 구조하기 위해 모인 봉사자와 동물단체 활동가들이 개들을 바라보고 있다. ⓒ 한국토토뉴스한송아 기자
봉사자가 입혀준 옷을 입고 있는 백구 순둥이 ⓒ 한국토토뉴스한송아 기자
농장 발견 후 개들의 구조를 위해 고군분투한 봉사자들은 다행히 이날만큼은 갇혀있는 동물들을 무거운 마음으로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개들을 한 동물보호단체의 쉼터로 옮기는 날이기 때문이다.
인근 주민의 제보에 따르면 해당 농장은 본래 식용 목적으로 개를 기르며 실제 도살도 하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이씨는 개들을 보러 갈 때마다 개들이 없어졌을까 봐 두려워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주인이 개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은 것은 보상금 때문이었다.
식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면서 판로는 점점 줄었다. 게다가 식용 목적의 사육과 도살을 금지하는 ‘ 식용 종식법’ 제정으로 더 이상의 농장 운영은 어려워졌다. 주인은 재개발로 인한 보상, 사육 농장의 폐업 지원금 등을 바라고 일명 ‘알박기’로 개들을 남겨 버텼지만, 불법 사육 시설 등으로 보상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자 개들을 포기했다. 그 사이 버티지 못한 개들은 죽어 나갔다.
“지난해 말, 개들을 데려가도 된다는 주인 아저씨의 말에 본격적으로 매일 봉사자들과 물과 밥을 주러 다녔어요. 문제는 당장 개들을 옮길 곳이 없어 막막했죠.”
하지만 이씨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저 생명들에게도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다. 이씨와 뜻을 함께한 봉사자들은 남은 18마리 개들에게 모두 이름을 지어줬다.
작지만 날쌘 다람쥐 같은 강아지는 ‘다람이’, 사람만 보면 좋아서 발을 동동 구르는 백구는 ‘동동이’ 등 견사마다 봉사자들이 붙여놓은 이름표에서 애정이 잔뜩 묻어났다.
18마리 중 3마리는 봉사자들이 임시 보호처로 먼저 빼냈다. 1마리(달달이)는 비영리사단법인 포켓멍센터에서 구조했다. 남은 14마리 개들을 이날 동물보호단체 코리안독스에서 데려가기로 했다.
김복희 코리안독스 대표가 견사 내에서 백골이 된 사체를 발견하고 놀라고 있다. ⓒ 한국토토뉴스한송아 기자
이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개들이 죽어간 걸까. 활동가들이 개들을 이동장에 넣기 위해 견사 내로 들어가자 이미 죽어 백골이 된 개가 묻혀있던 것도 발견됐다.
이날 남은 개들을 안전하게 옮기기까지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박성지 씨 외 4명의 반려견순찰대 소속 봉사자들은 견주가 개들의 권리를 양도한 두 달 전부터 매일 번갈아 개들에게 밥과 물을 주며 돌봤다. 주인이 개들의 권리를 양도하는 절차와 구조 방법을 함께 모색하고, 연휴에도 나와 개들을 살펴준 강남구청 지역경제과 공무원들의 역할도 컸다.
이날도 현장에 가장 먼저 나와 구조 봉사를 함께한 이지연 강남구청 지역경제과 팀장은 “한파가 시작된 오늘 마침 개들을 구조하게 돼서 다행이다”라며 “오랜 기간 고생한 개들이 남은 생은 행복하게 살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봉사자가 가져온 삶은 달걀을 개에게 주고 있다. ⓒ 한국토토뉴스한송아 기자
강남구청 지역경제과 공무원들이 구조 현장에 나와 눈길에 연탄을 뿌려 봉사자와 활동가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작업하고 개들에게 물을 주고 있다. 이동윤 주무관(왼쪽)과 채소진 주무관 ⓒ 한국토토뉴스한송아 기자
남은 동물들이 안전한 곳에서 돌봄을 받으며, 입양처를 찾을 기회를 주기 위해 구조를 결정한 코리안독스도 큰 결심을 해야 했다.
김복희 코리안독스 대표는 “현재 우리 쉼터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강추위에 오물더미에서 지내고 있는 동물들을 외면하기 힘들었다”며 “마침 추가 견사를 짓고 있어 구조하게 됐다”고 전했다.
봉사자가 개들의 사연을 올린 게시물을 온라인에서 우연히 본 강소영 서울디지털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도 개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 강 교수는 심장사상충 등 개들의 치료를 위해 도움을 줬을 뿐 아니라, 개들이 안전히 지낼 수 있는 쉼터의 견사 마련에도 힘을 보탰다.
이현정 씨는 “앞으로 쉼터에 찾아가 봉사하고 입양처 찾는 일을 도울 예정”이라며 “아직 국내에 많은 농장이 남아있는 만큼 지자체와 시민 봉사자, 동물단체들이 합심해 새 삶을 찾는 개들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소망을 전했다. [해피펫]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개농장에서 개들을 구조하기 위해 모인 동물단체와 시민 봉사자, 강남구청 지역경제과 공무원들이 개들을 이동장에 모두 넣은 후 사진을 찍고 있다.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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