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지에서 출토된 16세기 백자 조각. ‘산디’라는 한글 붓글씨가 또렷이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동궁과 월지’는 신라 전성기에 만든 궁궐 유적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30대 임금 문무왕(재위 661~681) 때인 서기 674년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나온다. 조선 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든다고 월지 대신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렀다.
그런데 신라 궁궐 연못인 월지(안압지)에서 한글 붓글씨를 비롯해 다양한 묵서가 적힌 조선 시대 백자 조각들이 무더기로 확인됐다. 1970년대 월지를 발굴 조사한 지 50년 만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지난 9일 현장 공개회를 열고 “1975~1976년 발굴한 ‘경주 동궁과 월지’ 출토품을 재정리해 조사한 결과, 16세기에 제작된 백자 조각에서 다양한 내용이 적힌 묵서를 처음 확인했다”며 실물을 공개했다. 월지가 통일신라 멸망 후에 황폐화된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까지 활용됐다는 의미라 주목된다.
신라 전성기에 만들어진 궁궐 유적 ‘동궁과 월지’의 야경. /경상북도
국립경주박물관이 지난해부터 10년 계획으로 추진 중인 ‘월지 프로젝트’의 첫 결과물이다. 1970년대 월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8000여 점의 조선 자기 편 가운데 이번에 묵서가 확인된 것은 130여 점. 대부분 가마에서 포개어 구울 때 유약을 바르지 않는 굽(바닥) 부분에 먹으로 글씨를 썼다. 특히 ‘용왕(龍王)’이라는 글씨가 적힌 백자 조각들이 여러 점 확인돼 눈길을 끈다. 박물관은 “이 백자들은 제사에 쓰는 용기들로 적어도 16세기까지 월지에서 용왕과 관련된 제사가 치러졌다는 증거”라고 했다. 제사의 주재자를 뜻하는 ‘졔쥬’라는 한글 묵서가 적힌 백자가 발견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조선 16세기 백자 조각들에서 용왕(龍王)이라는 묵서가 적힌 것이 여러 점 확인됐다. /국립경주박물관
그동안 학계에서는 통일신라 시대까지 월지에서 용왕 제사를 지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월지에서 출토된 ‘신심용왕’(辛審龍王)명 신라 토기가 용왕과 관련된 제사 용기였고, ‘삼국사기’에 월지를 관장한 동궁관(東宮官) 예하에 용왕전(龍王典)이라는 관부가 있었다는 기록 등이 근거다. 이현태 학예연구사는 “통일신라가 멸망하고 나서 용왕 제사의 맥도 끊어졌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에 ‘용왕’이라는 묵서가 적힌 제기(祭器)가 여러 점 확인되면서 적어도 16세기까지는 월지가 용왕과 관련한 제사 또는 의례 공간으로 활용됐음이 분명해졌다”며 “용왕 제사의 성격에 대해서도 그동안은 용이 물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기우제와 관련됐을 것이라고 추정해왔지만 앞으로 자료들을 통해 더 정리해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한글 ‘졔쥬’라는 붓글씨가 적힌 조선 16세기 백자 조각. /국립경주박물관
‘산디’라는 한글 붓글씨가 또렷한 백자 조각도 나왔다. 이현태 학예사는 “백자의 소유자 등 사람 이름일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은 단정할 수 없다”며 “경주 지역에서 조선 전기 한글 관련 자료가 나온 적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산디’ ‘졔쥬’ 등 한글 묵서명 백자는 16세기 경주 지역의 한글 문화 연구에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했다.
박물관은 앞으로 ‘월지 프로젝트’의 성과를 순차적으로 공개할 계획이다. 이번에 확인된 백자 조각들은 내년 월지관 재개관 때 상설 전시를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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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허윤희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