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경상도 지역말을 담은 깃발과 손팻말들. ‘덜내삐고 뽀사삐자’는 구호는 할매할배들도 쉽게 안다. 필자 제공
권영란 | ‘지역쓰담’ 대표
흰 깃발에 ‘윤석열이 덜내삐고 국민의힘 뽀사삐자’가 선명하다. 분노로 추위에 떨다가 순식간에 유쾌해졌다. 더하고 뺄 것 없는 우리 동네말이다. 할매할배들도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안다. 탄핵, 파면, 해체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발 딛은 곳 주민답게, 지역말로 국민적 요구를 담은 구호다. 지역민 커뮤니티 공간에서 딸 둘을 둔 30대 주민은 사상 초유의 헌정파괴 현장을 실시간으로 겪고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좀 더 필요한 부분은 ‘사랑과 한끗센스와 재미’라고 말했다.
겨울이면 지리산 자락 산청에서는 곶감이 돈이다. 남해안 일대 주민들이 굴막에서 굴을 까고 돈 사듯이 12월과 1월 내내 곶감막을 돌보며 돈 산다. 계엄 해제 후 두번째 집회였을까. 찬바람 속에 높이 치켜든 주민의 손팻말이 와락 다가온다. 크게 자른 종이에 손글씨로 ‘김장도 해야 되고/ 곶감도 깎아야 하고/ 석열이 니도 내리야 되고/ 바빠 죽긌다! 쫌!!’이라 적혀있다. ‘불법계엄 윤석열 고마 치아라 마!’ ‘니 안좄다 꺼지라!’는 구호도 눈에 띈다. 온종일 딸기하우스에서 일하다가 탄핵 광장으로 나오는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분노를 담은 구호이다. 그런가 하면 ‘엔가이 하고 내려가라’며 ‘모지리 권력자’를 타이르는 구호도 있었다.
시골 읍내 광장에 나온 구호에는 지역에서의 삶이 있다. 천리 길 서울 탄핵 광장으로 달려갈 수 없지만, 청년들처럼 형형색색의 응원봉이 없지만 내 손으로 깃발을 만들고 손팻말 구호를 만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긴 싸움이 될지 모르는데 ‘탄핵 광장’에서 좀 더 지역답게 좀 더 재기발랄하게 하자는 요구들이 튀어나왔다. “우리 동네서 하는 거 동네말로 함 맹글어 보입시더.” 그러자 주민들 사이에서 지역말 구호가 쏟아졌다. 희한하게도, ‘덜내삐자 뽀사삐자 가다삐자’를 외칠 때 더욱 활기찼다. 공동체 안의 연대는 한마디의 지역말에서 시작된다.
맞다. 모든 지역, 모든 땅에는 그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토박이말이 있다. 삶이 있고 다양한 정서가 깃들었다. 지난 연말 출간된 유유출판사의 ‘지역의 말들’ 시리즈를 지켜봤다. ‘충청의 말들’에서 ‘전라의 말들’ ‘경상의 말들’ ‘서울의 말들’까지…. 일부 작업을 같이하기도 해서 좀 더 들여다봤다. 새해 벽두 유유출판사에서 각각의 지역말로 카드뉴스를 내놓았다. 전라도에서는 “아따 저 번판이 징하게 끈질기네잉” 충청도에서는 “뭔 삶은 호박에 이빨두 안 들어가는 소릴 하구 그랴” 경상도에서는 “뭐라 캐싼노. 낯빤대기가 저리케나 두껍노” 피의자 윤석열과 공범들의 궤변을 빗댄 지역말이다. 지역 정서를 그대로 담았다.
지역소멸이 한국사회의 위기가 된 지 제법 됐다. 인구가 줄어드는 만큼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 지역 토박이말이다. 정치·언론·학계는 한결같이 “지역소멸, 로컬이 답”이라 입을 모으지만 가장 지역다운, 지역을 특정하는 것 중 하나인 지역 토박이말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경제적 효용성이나 가시적 성과에서 해결책을 찾다보니 아예 인식 밖에 있다. 하지만 매번 출생률 저하와 고령화 수치로 지역을 겁박하기보다는 지역말 되살림에서 물꼬를 트는 것이 어떨까. 말이 지역 정체성과 문화 다양성을 회복하는 열쇠라면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은가.
피의자 윤석열 구속 확정 소식에 산청사람들 목소리가 더 커졌다. “내란공범 모졸티리 가다삐자”고. ‘모두 구속하라’는 말보다 직설적이다. 궁금하다. 지금의 내란 정국이 끝나는 순간 어떤 인사를 나눌까. 경상도 남쪽 끝에서는 “욕봤제, 애나로 욕봤어예!”라며 서로 부둥켜안을게다. 우리 동네서는 수고했다는 말보다 훨씬 도타운 말이 ‘욕봤제’다.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파면’을 내리치는 순간 서울,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제주도에서는 서로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